뉴질랜드 북부 여행4(노스랜드 )- 마오리 전쟁
마오리 전쟁
1843~1870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다. 웨이크필드가 이끄는 뉴질랜드 토지회사의 지나친 토지 매수가 발단이 되어 일부 추장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토지 전쟁을 벌였고, 뉴질랜드 중부지역에선 토지 판매를 중단시키려는 King Movement가 일어났다.
1860년에 타라나키에서 초대 마오리 왕 포타토우 1세에게 집결한 마오리군과 영국군 사이에 마오리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북섬의 타라나키, 와이카토 지방을 중심으로 12년에 걸쳐 계속된다. 당시 영국군은 14,000명으로 영국 본토에 남아 있는 방위병력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전쟁은 부분적으로 파케하에 의한 공식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계속되었고 1872년까지 마오리 소유로 남은 토지는 전국토의 1/6에 불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마오리족의 패배로 끝이 났는데, 자존심이 강한 마오리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고 한다. 마오리 사람들이 다시 일어선 것은 1880년대의 마오리 부흥운동 이후이다. [1]
한편, 영국은 마오리족의 반영(反英) 감정 완화를 위해 힘썼고,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노력을 통해,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마오리족과의 공존관계 설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노력은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법이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52년에는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882년 냉동선이 개발되자 오지도 낙농을 중심으로 개발이 크게 진척되었다. [2]1890년대부터 뉴질랜드 국회는 여성의 투표권, 양로 연금 같이 진보적인 법률들을 발의하였다. 그 후 뉴질랜드는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1907년 9월 26일 영연방 내 자치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복지 국가로서 발전되었다. 1947년 11월 2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 본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참전·활약하였다.
살림집 한쪽을 터서 만든 작은 카페인데, 나이 든 분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삶의 여유를 만끽하며!
테이블에 놓은 꽃은 생화였다.
흰색의 벽과 가구들이 깔끔했다.
하루 중 몇시간만 여는 것 같았다. 삶의 여유, 인생을 즐기는 삶이라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