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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원생활잡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전남 해남군 옥천면 정두채·김은숙 씨 부부

아시아자동차 부회장, 기아자동차 고문, 광주 남구청장을 역임한 잘나가는 경영인이었던 정두채 씨는 아내 김은숙 씨와 함께 귀향해 차밭 일구고 정원 가꾸며 ‘여기 사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20여 년 전부터 목가적인 노후 생활을 꿈꾸며 틈만 나면 내려와 다듬어온 고향 땅 옛집이기에 더 어깻바람이 난다.

 



저 멀리 남쪽으로 두륜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이름을 따 ‘마고 동산’이라 이름 붙인 정두채(67)·김은숙 씨(67) 부부의 터전을 훑어보면 대략 이렇다. 우선 정원 서쪽에는 비단잉어가 유유히 노니는 연못이 있어, 거기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정원 가장자리를 따라 서출동류(西出東流)한다. 금잔디가 깔린 정원에는 300여 종의 나무와 화초가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는데, 푸조나무·삼나무 따위의 교목이 간간이 섞여 크고 작은 그늘을 만든다. 집 뒤로는 동백나무 숲이 병풍을 두른 듯 우거져 있다. 그리고 끝으로 집 건너 맞은바라기 언덕에는 3000평 차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천천히, 조금씩 준비하다 보니 묵은 집인 듯 자연스러워 좋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화원에 들러 철 지난 꽃나무들을 싼값에 사다 심었는데, 그게 세월이 흘러 이렇게 멋진 정원이 됐어요.”
넉넉한 정원에는 벌·나비뿐 아니라 새들도 몰려들게 마련이라, 가을에 담장가의 보리수를 딸 때면 새들과 다투기도 한다는 정씨. 연못가에서 긁어모은 잔디 가시랭이를 태우고 있는 그의 구릿빛 손은 더 이상 금장 만년필 들고 결재하던 세련된 손이 아니다.
대기업 임원과 지역자치단체장을 두루 거친 정두채 씨 부부의 귀농을 두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사가 축적한 부를 가지고 고향에 들어와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씨 부부는 자신들의 노후 설계에 맞춰 철저히 농부가 될 준비를 해온 사람들이다.

 



잘나가는 경영인에서 차밭 주인으로
먼저 일반적인 선입견을 깨보면, 잘나가는 경영인이기는 했지만 정씨는 그다지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 꽃나무 가꾸는 게 좋아 서울 살 때도 작은 비닐하우스라도 만들 수 있는 마당 넓은 집을 찾아 북한산 언저리의 단독주택들만 돌아다녔기에, 30년 넘게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그 흔한 강남 아파트 재테크 한번 해보지 못했다.
쭉 서울에서 살아온 정씨가 고향에 땅을 마련한 것은 1984년. 노후를 의탁할 만한 터전을 물색하고 있던 중, 설날 고향에 들렀다가 운 좋게도 조부의 고택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정씨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고향을 떠났고, 그동안 조부의 고택은 남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 고향집에 간간이 들려 나무를 심는 것은 아내 김씨의 몫이었다.
그러던 1988년, 고향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하늘이 알았는지 마침맞게도 정씨가 광주(기아자동차 공장장)로 발령이 났다. 정씨 부부의 귀농 준비는 그때부터 본격화됐다. 둘은 정원을 가꿈과 동시에 주변의 밭을 구입해 농장도 조성해나갔다. 그리고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며 정씨는 회사 생활을 접고 광주 남구청장에 출마해 당선, 삶의 근거지를 완전히 지방으로 옮겼다(“전문 경영인은 후배들이 아쉬워할 때 떠나야 한다”는 게 정씨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때의 결정 덕분에, 1997년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때 정씨는 아무 탈 없이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정씨는 기아자동차가 법정 관리에 들어가고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광주시의 추천으로 아시아자동차 부회장, 기아자동차 고문직을 3년여 역임한 뒤, 2000년 마침내 완전한 귀농을 했다. 터전을 마련한 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부부의 취미 같다는 것은 큰 자산이자 행복
고향에 정착한 정씨 부부가 처음 시도한 것은 콩 농사. 하지만 콩 재배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4000평 콩밭을 무농약으로, 그것도 초보 농사꾼 부부가 도전한다는 게 애초 불가능했던 것이다. 온 농장이 콩 반 풀 반이 되는 실패를 경험한 후 정씨 부부는 둘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농사를 찾기 시작했다.
병충해가 적어 농약이 필요치 않고, 과도한 노동력이 들지 않고, 악천후의 영향을 덜 받으며, 1회 식재로 장기간 지속가능한 작물이 무엇일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차였다. 더구나 해남이 차의 고장이라 지역적으로도 맞는 데다가 아내 김씨가 차인연합회 회원으로 20년 넘게 차를 공부해왔기에 낯설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정씨 부부는 둘이서 건사할 수 있는 차밭의 규모를 3000평으로 정하고, 2001년 보성에서 차씨를 구해와 파종을 했다. 그리고 공들이기를 5년, 차는 마음먹은 대로 잘 자라주었고 올해는 첫 수확의 기쁨도 누렸다.
“나이가 드니 부부의 취향이 같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느낍니다. 우리 부부의 경우 귀향하고 농사짓는 모든 과정이 아무 마찰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둘의 생각이 똑같았거든요. 요즘 나는 후배들 만날 때마다 부부간에 취미를 맞추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합니다. 그것이 자연친화적인 것이라면 더욱 좋고요.”
취미가 같다는 것은 노후의 가장 큰 자산이자 행복이다. 둘 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정씨 부부는 결혼 초부터 뜰에 가득 화분을 들여 놓고 감상하며 취미를 맞춰왔다. 김씨가 차와 인연을 맺은 것도 공유할 수 있는 취미를 늘리고자 한 정씨의 배려 덕분이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정씨는 귀국할 때마다 그 나라의 이름난 차를 구해다가 아내에게 선물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씨는 차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40여 년 전인 정씨의 군대 시절. 정씨는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하며 ‘자유의 벗’이라는 대민 홍보지를 만들었는데, 그때 김씨는 이웃해 있는 유엔방송국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씨가 마음에 든 정씨는 취재하러 갈 때 “바람이나 쐬자”며 종종 김씨를 ‘모시고’ 나갔고, 아침마다 김씨의 책상 위에 오렌지 하나를 올려놓으며 사랑을 키웠다.

옛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노후 모델
취미로 배운 차가 생업이 되면서 김씨는 2002∼2003년 순천대 최고농업경영자 과정 녹차반에 입학해 재배에서부터 제다까지의 전반적인 실무 과정을 모두 익혔다. 그리고 2004년 해남군에서는 최고령으로 농산식품가공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각종 제다 시설을 갖추며 차를 사업화할 기반을 모두 갖췄다. 현재 김씨는 해남군 농산물가공연구회 회장을 맡아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아내의 열정을 북돋기 위해 정씨는 ‘은향다원’이란 상호를 손수 지어 아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은향(誾香)은 ‘화기애애한 향기’란 뜻으로, 이 말 속에는 정씨 부부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치열한 재계에 오래 몸담고 있다 보니 노후가 짐작이 갑디다. 은퇴 후 도시에 있어 봤자 닭장 같은 아파트 안에서 소일하는 게 전부잖아요. 결국 답은 자연이고 농촌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부부가 노후 설계를 잘했다고 자부합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옛 동료들도 가장 모범적인 노후 모델이라며 부러워하고요. 우리 나이에 필요한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여유는 농촌에 있습니다.”
정씨 부부는 내년부터 은향다원이란 상표를 단 차를 본격 선보일 계획이다. 올해 시범적으로 수확한 차를 덖어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눠줬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내년의 목표 수익은 1000만 원. 그렇다고 고수익을 위해 무리할 생각은 없다. 둘의 노동력으로 정성껏 농사지어 명품 차를 만들면 그뿐이다.
은퇴 후 농부가 된 것을 큰 축복이라 여기며 노후 생활의 모범 답안을 만들고 있는 정씨 부부. 차는 만든 사람의 성품을 닮는다. 은향은 정씨 부부의 삶의 향기다. 문의 061-535-3005 글·이승환 기자 | 사진·임승수(사진가)

출처 : eunhyanghill
글쓴이 : 은향다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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