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특별한 모녀 관계
어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인 외동딸을 고아들과 함께 키우면서 딸에게 자신이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딸은 고아원 오빠들이 가끔 '원장딸'이라며 꿀밤을 주고 갈 때, 혹시 원장님이 자기 어머니일까, 어머니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지만 원장님은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배려나 눈길 한번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아'로 성장했다.
딸에게 어머니임을 감췄던 애광원 원장
1952년 어느 날 갓 낳은 딸을 가진 젊은 어머니 김임순은 대학시절의 선생님에게 이끌려 어떤 움막에 가 보니 생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일곱 명의 영아들이 있었다. 선생님이 그 아이들을 좀 돌봐주라고 해서 몇 시간이나 돌보면 되느냐고 했다가, 부모 없는 갓난이들을 몇 시간 돌보는 게 무슨 말이냐고 꾸중을 듣고 졸지에 아기들을 떠맡게 되었다.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밤새 황망히 기도하던 이 젊은 여성은 새벽에 "네가 그 아이들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끌어올려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들었다. 그 후 57년간 이 여성은 고아들을, 나중에는 장애아들을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에서 자라고 생활하게 만들어 주는데 헌신했다.
이렇게 6·25전쟁 직후 영아원으로 출발한 거제도 소재 '애광원'은 처음에는 전쟁고아들을 길렀지만 차츰 몸이 성한 고아들은 성장해서 떠나고 장애아들은 남게 되고 애광원 앞에 버려지는 아이들 중에 장애아들이 많아지자 78년에 장애아시설로 인가를 받은 후 수많은 고비를 딛고 현재 230명의 장애아를 수용하고 있다. 장애아를 위한 정식 학교도 설립, 운영하고 있어서 애광원의 원생들과 또 100명의 통학하는 장애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애광원을 설립하기 위해서 김임순 여사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회에서 모금활동을 하고 장애아시설 건축을 전공한 건축학자를 애타게 찾아 건물 설계를 받았다. 현재 각기 장애 정도가 다른 원생들을 수용하는 5개동의 시설과 체육관이 있는데 각 동마다 몇 년간의 모금으로 착공해서 완공 후 몇 년간 채무변제를 했다.
애광원의 장애인들은 대부분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어린이, 어른들인데 밥을 떠먹여 주고 대소변 수발을 해 주는 것은 물론 몸을 뒤쳐 눕는 것 까지 보살펴야 하는 장애인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인지능력이 있는 원생들에게는 교과, 예능교육과 함께 자활을 위한 기술교육을 시킨다. 그래서 애광원에서 생산한 각종 무공해 빵이나 수공예품, 농산품은 지역사회의 인기상품이고 원생들의 합창단, 합주단, 사물놀이패들은 지역주민을 위해서 뿐 아니라 서울, 부산 그리고 일본과 독일에서도 절찬리에 공연을 했고, 원생들에게 자긍심과 성취감을 고취하고 있다. 그래서 애광원 원생들은 모두 표정이 밝다.
보통 고아원은 원아들이 성년이 되면 시설에서 내보내지만 장애인들은 나이가 차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 극히 적어서 대부분 원생들을 일생 돌보아야 한다. 간혹 애광원의 시설이 장애인들을 수용하기에는 아깝다고 하는 말은 김임순 원장을 분노케 한다. 어느 사회나 인구의 일정 비율은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장애인이 되므로 우리 모두의 장애를 대신 지니는 장애인들은 정상인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훨씬 나은 보살핌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김임순 원장의 열렬한 소신이다.
편안한 노후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온 딸
김임순 애광원 원장은 일찌감치 막사이사이상 등 영예로운 상도 많이 수상했고 국내, 국외에서 저명인사로서 이제는 후원자도 2천명이나 되고 매년 기부금도 상당액 들어오지만 85세인 지금도 원생들이 생산한 식품, 수공예품을 바자에서 판매를 하기 위해 매년 여러 번 서울에 온다. 매번 매상이라야 대단찮은 금액이지만 아직도 자활지원센터 등 짓고 있는 건물이 있고 여름에도 장애인들이기 때문에 난방을 해야 하고 특수교사, 보육사를 수십 명 고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 푼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장님이 친어머니인 것을 중학교 진학 무렵에야 알 수 있었던 외동딸 송우정 여사는 연세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거주해오다가 최근에 따님을 원장의 후계자로 선정한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귀국해서 애광원의 상임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세계굴지의 화학회사 듀폰의 상임연구원인 남편과의 편안한 노후를 포기하고.
* 이 글은 12월 9일자 부산일보에 게재되었던 글로 ‘성숙의 불씨’ 독자들도 읽어주었으면 하는 필자의 요청에 따라 보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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