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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카 해외봉사활동 지원기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17. 11. 6. 08:04





나도 해외봉사활동 갈까?

 

여보, 나 코이카 지원할까봐

? 뭐라구요?”

전부터 말했던 코이카 해외봉사단에 지원하려구...근데 고민이 있어

그렇죠. 90이 다된 어머니를 두고 떠난 다면 다들 뭐라고 하겠어요?”

그래서 고민이라구. 큰 딸은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는 하는데.....”

글쎄요

여보. 우리 먼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코이카단원으로 갔다 온 이 선생님 부부를 함께 만나보면 어떨까?

글쎄요....어머니에게는 뭐라고 말씀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내가 결심하고 난 후 어머니와 아들 딸에게도 말 하자구....”

      

정년퇴직 하고나서 자식들이 마련해 준 효도여행을 인도네시아 발리로 떠났다. 자식들은 직장 때문에 먼저 귀국하고, 나와 아내는 발리에서 더 있다가 반둥과 말레시아를 한 달 가까이 여행을 계속했다.

다음해 나는 2월 하순에 출발한 ‘45일간의 남미 배낭여행에 합류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4월에 돌아와 휴식과 함께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 6월이 되어서야 코이카 해외봉사를 검색을 해보니 내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조금씩 관심을 갖고 휴식할 겸 등산과 캠핑을 다니며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금처럼 살면 후회하지 않을까?

()의 의미(意味)는 무엇일까?

긴 시간 여행을 다녀왔는데도 퇴직(退職) ()에 오는 상실감, 허전함이 적지 않았다.

 

7월이 되어서야 코이카 해외봉사단 모집공고가 났다. 마침 아프리카에 내가 지원 할 과학교육단원을 뽑는다고 공고가 나왔다. 지원서를 작성하면서도 과연 합격이 될까도 문제였지만, 합격되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항상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것은 첫째 90을 바라보는 노모와 장모님이 계시는데 봉사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 한국정서에 맞는 일인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코이카를 다녀 온 선배 시니어 단원들을 만나보았다. 그랬더니 그들도 내가 고민하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 그런 문제는 나이들어서 지원하는 시니어에게는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문제이다. 그런 것 다 따지면 갈 수가 없다. 무조건 도전해 보세요. 나중에 후회합니다.”라고 말했다.

나에게 용기를 준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다녀오신 분들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임지에서 활동하다가 부모님 상을 당했던 분들도 계셨고, 임지에 파견되어 활동 중에도 부인이 아파서 중도귀국하신 분, 현지적응이 어려워 중도 귀국하는 사례 등을 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나에게 두 번째 고민은 결혼 전인 아들이 어서 직장다니면서 집안살림과 노모를 아들에게 맡기고 떠나는 것도 큰 부담이 되었다. 셋째는 내 건강문제였다.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체력은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의료시설이 부족한 곳에서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였다

각고의 고민 끝에 자식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서를 작성하는데도 장난이 아니었다. 10여 일 동안 열심히 지원서를 작성했는데도 흡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변할까봐 지원서를 마감 며칠 앞두고 제출했다. 영문이력서에는 내가 근무하게 될 기관장이 내가 교장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도록 경력에 적지 않고 발송하였다. 제출하고 나니 마치 입학시험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험을 치렀던 나였지만 시험은 역시 시험이었다. 합격인가 불합격일까?

 

코이카 1차 서류전형에 통과되었고, 2차 면접시험과 적성검사에도 통과 되었다. 이제 남은 3차는 건강검진이다. 코이카에서는 건강상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1차 검진 결과 무사하기를 바랐지만 재검에 걸렸다.

재검은 당뇨검사와 신장 부분을 초음파해 보라고 나왔다. 서울에 있는 지정병원에서 해야 하는데, 검사비용은 자비부담이다. 초음파는 의료보험 적용이 안되어 27만원이나 지불했다. 검사결과 당뇨는 약을 먹으라고 하여 처방을 받았고, 신장에는 물혹이 있다고 하였는데, 파견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속으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병원문을 나섰다.

 

7월에 원서 접수를 하고 면접과 건강검진을 하고 재검까지 받으니 9월도 하순이 되었고, 10월 하순에 국내교육을 5주 받고 나니 11월 말이니 5개월이나 소요되었다. 기다림의 꽤 긴 시간이었다.

연수원에서 국가별로 국내교육 1주일부터 차례대로 파견된다고 일정을 알려주었다. 내가 가야하는 아프리카 탄자니아는 파견 날짜가 1214일로 계획되어있었다. 그러니 국내교육을 마치고 2주 동안에 출국준비를 해야 했다.

바쁘다 바빠

그 사이 내가 갈 탄자니아 이링가에 대한 정보를 먼저 다녀왔던 지인으로부터 들었고, 현재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선배단원에게 자세한 정보를 메일로 얻으며 준비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출국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많이 고민을 했다.

비행기를 타야하나 마나?많이 망설였다.

 

드디어 파견이다. 1214일 식구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사위가 인천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수화물 중량이 50Kg인데 초과될까봐 불안했다. 약간 넘었는데도 고맙게도 통과시켜 주었다. 탄자니아로 파견되는 우리97기동기가 한 명 뿐이라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공항에서 단복을 갈아입고 기념촬영 후 벗어 가방에 넣고 편안한 차림으로 탑승 수속을 받았다.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다.

이렇게 해서 정년퇴직 후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나의 옛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