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미래 사회에 적응하려면 어른들도 스마트폰을 잘 사용해야한다. .
오늘은 수원평생학습관에서 비대면 강의를 했다. 코로나로 인해 바뀌어 진 강의 방법이다. 청중이 없는 곳에서 혼자 하려니 어색했다. 나이 든 친구들에게 내 강의를 알리니 스마트 폰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다는 사실에 신기해 하기도 했다.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 줌(ZOOM)사용방법을 몰라 수강신청 하기가 어려웠다.
노예무역이 많이 이루어진 나라가 탄자니아다.
현생 인류의 탄생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해외봉사하던 중 방학을 이용해 다녀보았던 역사의 흔적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제한 된 시간으로 인해 정작 노예해방에 큰 공을 세웠던 리빙스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아프리카! 그건 내겐 유혹이었다
– 노예들의 슬픈 역사 탄자니아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지금으로부터 180여 년 전, 검은 땅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에 백인 선교사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선교사, 탐험가, 의사요 노예 해방주의자였던 리빙스턴은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빙스턴의 가정은 2세대에 걸쳐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 니일은 차(Tea)를 파는 행상으로 일하기도 했다.
▲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다
18-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적인 교인들의 열정에 의해서 해외 선교회(Church Mission Society)나 런던 선교회 등의 선교회들이 설립되고 있었는데, 소년 리빙스턴도 중국 의료 선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독학하여, 글래스고우의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했으나, 1840년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일어난 아편 전쟁 때문에 중국에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팻의 영향으로 1840년 런던 전도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 처음 가 본 아프리카는 이러했다.
아프리카는 신비롭고 아름답긴 했지만 리빙스턴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낯선 곳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서 한번 찾아 가려면 사막이나 밀림을 지나야 했다. 그때마다 느닷없이 덤벼드는 사나운 맹수에게 쫓기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가 갑자기 오므라들면서 그 앞을 지나던 리빙스턴의 몸을 덮치는 일도 생겼다. 소문으로만 듣던 사람 잡아먹는 나무였다. 리빙스턴은 있는 힘을 다해 나뭇잎에서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하루는 초원을 지나다 갑자기 나타난 사자와 맞닥뜨렸는데, 리빙스턴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사자에게 왼팔을 물렸습니다. 급한 대로 몸에 지니고 있던 총으로 사자를 쏘아 물리치긴 했지만, 평생 동안 왼팔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늘 위험한 일만 생기는 건 아니었고, 흑인들 과 만나 때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 리빙스턴의 편견
흑인들이 처음부터 리빙스턴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백인인 노예 사냥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총으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 갔가 때문에 백인이라면 무조건 겁을 내고 도망쳤다. 이런 아프리카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리빙스턴은 흑인들과 친하게 지낼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흑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기 전에, 먼저 아프리카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흑인들이 사용하는 말과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풍습, 생활 습관까지도 익히려고 노력했다. 그런 뒤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하나님을 믿으라 고 했다. 그러나 그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리빙스턴은 기독교를 내세워 아프리카 토속 종교는 미신이라고 깔보기도 했고, 백인들의 문명과 종교는 아프리카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아프리카를 미신과 무지에서 구하러 왔다고 스스로 믿었다.
▲잠베지강과 빅토리아 폭포 발견
리빙스턴은 타고난 탐험가적 기질이 있었다. 그는 기독 교를 전하는 선교의 목적도 있지만, 백인들이 발을 들여 놓지 않은 밀림의 깊숙한 곳까지 탐험하고 싶은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탐험 정신이 강한 리빙스턴은 밀림을 지날 때마다 지도를 만들어 길을 표시해 두곤 했었다. 탐험중 아프리카를 소개시켜 준 모패드 목사의 딸을 만나서 결혼식도 올렸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아내 역시 흑인들을 깊이 이해하고 리빙스턴이 밀림을 탐험하러 떠날 때 큰 용기를 주곤 했다. 그 덕분에 결혼한 후에도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은 계속되었다.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니그로 부락에 머무르면서 복음 전도, 원주민 문화의 연구 등을 시작하였다. 1849-1856년, 제1회 탐험을 시작하여 칼라하리 사막 횡단, 1849년 느가미 호의 발견, 1851년 잠베지 강 발견, 1855년 빅토리아 폭포 발견 및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귀국하여 ‘전도 여행기’를 발표하였다.
▲ 노예 사냥꾼을 만나다
하루는 강가를 지나다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 깜박 잠이 들었다. "빨리 걷지 못해!”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뒤이어 채찍질 하는 소리와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오는 소리에 리빙스턴 은 퍼뜩 눈을 떴다. 비명 소리와 채찍질 소리 때문에 잠이 완전히 달아난 것이다.
리빙스턴은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보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는데, 멀지 않은 강기슭에서 아주 이상한 행렬이 눈에 들어 왔다. 벌거숭이 흑인들이 손에 밧 줄이 묶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백인들은 벌거숭이 흑인들에게 마구 채찍질을 하며 빨리 가라고 소리질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노예 사냥이었다.
노예 사냥꾼들은 흑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앞뒤로 밧줄을 엮어 놓고 걷게 했다.
이 모습을 지켜 보던 리빙스턴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 흑인들이 끌려가고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노예 사냥꾼에 게 흑인들을 풀어 주라고 부탁했다. 그렇지만 노예 사냥꾼들은 쓸데없는 간섭을 하면 죽이겠다고 도리어 총을 꺼내 위협했다. 노예 사냥꾼이 리빙스턴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리빙스턴도 할 수 없이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노예해방
1858년 켈리마네 주재 영국 대사가 되었으며, 영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앙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6명의 대원을 이끌고 잠베지 강 유역을 조사하던 중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매매를 보고 이에 간섭하여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과 영국간에 말썽이 생겨 영국 정부에서 리빙스턴에게 탐험 중지 명령을 내렸다.
▲연락이 끊긴 리빙스턴을 스탠리 기자가 수색대를 이끌다
1866년 왕립지리협회의 의뢰를 받아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므웨르 호와 뱅웰루 호 등을 발견한 후, 탕가니카 호반 ‘우지지’에 도착하였다. 1871년 여기서 열병에 걸려 사경에 빠졌으나 11월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를 찾아 헤맸던 스텐리는 “당신이 리빙스턴 박사입니까”라고 물었을 정도로 리빙스턴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그 후 스탠리 일행과 함께 탕가니카 호 북부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듬해 스탠리와 작별하고 탐험을 계속하였다.
- 헨리 모턴 스탠리 기사(Sir Henry Morton Stanley, GCB, 1841년 1월 28일 ~ 1904년 5월 10일)는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으로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리빙스턴 사망
그는 1873년 5월 1일 극도의 쇠약과 병으로 뱅웰루 호반에서 사망하였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를 미라로 만들었는데, 현재도 그의 심장은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보존하고 있다. 장례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 말라리아 치료방법 개발
리빙스턴은 또 말라리아 치료방법을 개발했는데, 그 치료법은 후에 리빙스턴의 각성제(Livingstone’s Rousers)라는 약품으로 제작, 판매되기도 했다. 또 ‘아프리카 남부의 전도여행기와 조사(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라는 책은 지난 수년 동안 열대 열병 조사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가 쓴 전도 여행기를 당시 신문들은 앞 다투어 게재했었다고 런던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조애나 루이스 박사는 말했다.
▲리빙스턴에 대한 비판적 견해
한편 리빙스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도 만만치 않다.
리빙스턴은 가족과 정치인들, 다른 선교사들과 과학자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내고 일기와 여행일지를 남겼는데, 랭카스타 대학의 존 맥켄지 석좌교수는 “사람들은 리빙스턴의 글에서 그가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의 선교사역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상인과 군대가 드나들도록 하여 기독교 선교활동을 쉽게 하겠다는 생각, 즉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선교사들이 쉽게 드나들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인 잠베지 강 유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더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로 계몽해야 할,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리빙스턴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낮춰 부름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873년 그가 사망한 이후 제국주의자들은 리빙스턴을 그들의 ‘보호성자’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리빙스턴에 대한 찬반
자신이 태어난 말라위를 떠나 40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살고 있는 존 르완다 박사는 “말라위에 대한 데이빗 리빙스턴의 영향력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는 말라위에 기독교를 가져다주었고 말라위를 세계에 소개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에서는 쟁탈전이 벌어졌고 말라위의 경우 수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가 아프리카를 개척해 놓음으로써 강대국들이 보다 쉽게 우리의 땅을 빼앗아간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크리스천 위클리, 조영숙기자)의 글에서 발췌 편집 했다.
●귀로여행
코이카 해외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귀로 여행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가서 빅토리아 폭포관광을 위해 잠비아로 입국했다. 그곳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동상도 보았고, 리빙스턴 교회와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운좋게도 빅토리아 폭포관광열차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열차는 석탄을 때서 가는 증기기관차였다. 열차는 사전예매로 이루어졌는데, 비용도 내겐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몰랐으니 참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호사도 한 번쯤 해보았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황혼이 지는 썬셋을 즐기며 황금 빛 은은한 조명아래 은색 포크와 나이프와 번쩍이는 와인잔들이 놓여진 식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멋진 신사 숙녀들과 즐겼을 귀족들의 우아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잠비아 잠베이지 강에서 이루어진 썬셋 투어도 인상적이었고, 빅토리아 폭포를 관광하고 다음 날 헬기를 타고 투어도 했다. 참! 빅토리아 폭포를 여행가시는 분들은 '헬기 투어'를 해보세요. 저도 생전 처음으로 헬기타보았어요.
빅토리아 폭포를 마치고 다시 요하네스 버그로 가서 국내선으로 환승하여 케이프타운으로 가서 세계문화유산 테이블마운틴과 보태닉 가든(식물원) 투어와 물개섬, 아프리카 펭귄섬과 노동자들이 정착했던 알룩달룩한 마을을 보며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대형쇼핑몰이 있는 케이프타운 시내 투어를 즐겼다.
다음날 사흘간에 걸쳐 아름다운 가든루트 투어도 해 보았다. 나폴리를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배를 타고 들어간 섬은 이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천국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새로운 세상 아프리카의 유럽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기회가 있으면 해발 6천미터에 이르는 킬리만자로 등반 이야기와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잔지바르 여행을 소개하고 싶다.
오늘 강의에서 아프리카 여행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바랐다.
'코로나가 빨리 끝나 많은 분들이 자유를 찾아 떠나기를 바란다고'하며 강의를 마쳤다.
수강해 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