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88올림픽 개최 후라고 생각되니 불과 30여년밖에 되지 않았지요.
라면 이야기 들어 보셨나요?
- 라면이 처음 나왔을 땐 모두가 의아해 했지요. 첫 선을 보이기 위해 길 거리에서 라면을 시식 시켜 주었다고 하네요
중2 때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그 때의 라면은 지금보다 컷어요!!!
어렸을 때 연탄불에 노란냄비에 라면을 끓여먹었을 때의 그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삼양 라면'이 기억에 많이 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2개를 끓여 먹기도....!!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삼양식품이 닭고기 육수를 기반으로 1963년에 국내 첫 선을 보인 '삼양라면' 제품 이미지...100g이었던 라면의 가격은 10원이었다. 1970년 소맥분과 우지가격의 인상으로 20원, 1978년 50원, 1981년 100원으로 인상되었다.
? 라면 이야기?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태어났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 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날
삼양식품(주)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봅니다.
전 사장은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 사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기술을 들여옵니다.
하지만 외화가 없고 국교가 단절됐던 때라 라면을제조하는 시설을 들여오기는 하늘에 별따기 였습니다.
정부가 가진 달러를 민간이 원화로 사던 시절, 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제조 시설을 수입하기엔 전 사장도 돈이 부족 했고 가난한 정부도 옹색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전 사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 씨를찾아갑니다
“국민들 배 곯리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사장이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오랜 세월 이어집니다.
신용장을 열고 전 사장이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 했답니다.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 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전 사장은 묘조(明星) 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다음 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사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이 없고 아직 국교 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해 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무상으로 제공하고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5.000 달러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 주었다고합니다
면과 수프의 배합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전 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제작의 전 공정을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주지 않더랍니다.
전 사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 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고, 커피 한 잔이 35원이던 시절이니저렴한 가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옮겨온 글)
1960년대 우리나라는 6.25 전쟁 후라 산업도 형편없었고, 평균 수명은 54세 였답니다.
피난민 이었던 우리가족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삼양라면은 정말 맛있었고 배고픈 사람들에겐 커다란 선물이었지요.
그러니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 그 맛 좋은 라면을 지금은 열량이 높아서
먹지 않고 있습니다. ㅎㅎㅎ
비극이지요? ---*지인이 보내온 답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