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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출판도시의 숨은 이야기들[마해송 문학비]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13. 6. 10. 09:39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바위나라와 아기별]작가이자 시인인 마해송 문학비

 

'북시티' 중앙에 위치한 마해송 아동문학비는

아동문학작가 고 마해송 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문학비, 징검다리 디딤판, 바위같은 상자, 61개의 작은 별이 빛나는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해송 문학비   위치;다산교 옆

 

 

 

 

                               그옆에    마해송의 아들인 마종기 [시인, 의사]의        부모에게바치는 헌시비

                                    예술 한가족

 

        아동 문학가                                 현대 무용가

     아버지  마해송                              어머니 박학선

       1905~1966                                1915~2011

                                                       

먼길에도 숨길 고르시고                     겨울눈도 뿌리는데

   이승의 소리보다                              동대문 시장에서

    몇갑절 가볍게                              구제품 구두 사 신고

         당신은                                출퇴근 버스에 밟히면서

      미소 하신다                           꼼꼼이 꼼꼼이 무용만 아는                                                     

 

        아버지                                          어머니

 

[선종2에서]                                     [무용2에서]

 

                          마종기[아들]

                        시인  의사

 

  • 1905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
  • 1921년 일본대학 예술과 입학
  • 1923년 <샛별>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 나라와 아기별> 발표
  • 1924년 일본 <문예 춘추사> 입사, 방정환, 윤극영 등과 색동회 조직
  • 1931년 8월 그는 《어린이》지에 <토끼와 원숭이>를 처음 발표
  • 1933년(29살)에는 옛이야기를 재창작한 <호랑이와 곶감>을 발표
  • 1948년 1월에는 <떡배 단배>를 <자유신문>에 연재하기 시작
  • 1964년 <떡배, 단배>로 제1회 한국문학상 수상

     

    우화로 말하는 민족의 슬픔

    마해송 선생님은 1905년 개성 출신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퇴학을 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그 후 1923년 어린이 잡지 <샛별>에 우리 나라 최초의 창작동화로 알려진 <바위 나리와 아기별>을 발표했다. 우리 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하는 작품을 많이 쓰는데 반해 마해송의 작품은 머리로 생각해 봐야 하는 내용들이 많다.

    마해송의 작품은 대개 우화적 세계이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토끼와 원숭이>에서 토끼는 한민족을 원숭이는 일제를 상징한다. 원숭이는 토끼를 강제로 원숭이로 만들고 원숭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짐승이라는 말을 외치게 한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토끼들에게 검정물을 들이고 귀를 바싹 자르며 얼굴과 엉덩이의 털을 면도칼로 깎고 빨간칠을 하는 등 원숭이의 모습을 닮도록 강요한다. 이런 것 때문에 <어린이>지에 연재되던 것이 중단되고 해방된 이후에야 나머지 이야기가 발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 밖에 <떡배 단배>는 해방 이후 일제가 물러난 뒤 구소련과 미국 등 강대국의 경제적 침략과 종속화를 풍자적 기법으로 다루고 있다.

    마해송 선생님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렇게 우화적인 기법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에 깊은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마해송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너무나 약한 존재로만 그렸다는 것이다. 마해송 선생님의 우화에 나오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사람은 매우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이런 것들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똑같이 우화적 수법으로 현실을 풍자하고자 했던 이주홍의 강하고 우직한 우화와 비교하며 읽어 보면 더욱 흥미롭다.

     

    마해송은 1905년 1월 8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1911년(7살)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시작하던 그는 1912년 4년제 소학교인 개성 제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6년에는 3년 과정의 정토정 불교 중학교와 1년 과정의 야간학교인 개성 공립 간이 상업학교에 입학한다. 이듬해인 1917년 음력 4월 10일, 부모의 강요로 열세 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호적에 올리지 않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그가 폐병으로 요양을 하던(1928∼29) 중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불행한 색시를 그 자신으로부터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이혼한다. 1919년(15살) 9월 마해송은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3·1운동 이후 학교는 동맹휴학이 잦았다. 그 때마다 고향으로 자주 내려갔는데, 이 때 기차 안에서 4살 연상의 '순'이라는 여인을 만나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또 이때(중앙고보 재학 중) 문예잡지 《여광》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동맹휴학으로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보성고보에 전학하지만 다시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한 그는 1921년 12월 24일 일본으로 건너가 그 이듬해인 1922년(18살) 봄에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그는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홍난파 같은 사람들과 도쿄 유학생 극단 동우회를 조직하여 희곡과 동극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의 연인 '순'과는 입학 무렵(1922년 3월)에 일본에서 다시 만나 열흘 정도의 동거 생활을 하지만 '순' 남편의 등장과 철권단의 투고1)로 '순'은 중국으로 가고, 마해송은 고향에 붙들려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이 연애사건으로 호된 꾸지람을 듣고 연금상태에 불만을 갖게 되는데 그 불만을 동화로 쓴 것이 〈바위나리와 아기별〉이다.

    마해송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쓴 《아름다운 새벽》에서 '왕의 폭력에 의해서 사랑이 끊기었고, 사랑이 끊기었기 때문에 빛을 잃었으나, 한 번 죽은 다음 바다 속에서 사랑이 되살매 잃었던 빛을 도로 찾고, 꽃도 새로운 생명을 찾았다는 뜻'으로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썼다고 말한다. 또 '아버지의 꾸중으로 지금 집에 박혀 있으나 사랑은 끝내는 이길 것이라는 속셈이었다. 어른은 언제까지나 어린이를 소견 없는 철부지로만 생각하지만, 어린이도 사람이며 생각도 지각도 있으니 사람 대접을 하라는 울부짖음은 문 밖에도 못 나가고 갇혀 있을 때의 애절한 기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가 겪은 애절한 울부짓음은 어린이의 마음을 좀 알아주도록 어른에게 호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져 소년운동을 일으키는 동기가 된다. 그는 어린이 모임을 가져서 널리 사귀고 마음을 닦아 착한 일을 하며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1922년 조선 소년단을 창립하여 책임자가 되기도 한다. 당시에 그는 신앙심 없이 예배당을 다녔는데 '어린 사람들을 만나려면 쉬운 길이 예배당을 통하는 것밖에 없다'2)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1923년(19살)에 《샛별》지에 발표되었다. 마해송은 《샛별》지의 편집 일을 맡아하며 여러 가지 각본을 써 연극과 동화구연 따위의 공연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듬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3) 색동회에 가입(1924년)하여 어린이를 위한 문화운동을 계속하면서 《어린이》지에 많은 동화를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어머님의 선물>(어린이 25년 12월), <장님과 코끼리>(어린이 25년 12월), <두꺼비의 배>(신소년 26년 3월), <소년특사> 따위가 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해송은 일본으로 다시 가서도 날마다 술타령 만하다가 끝내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요양을 하게 된다.(1928∼29년) 퇴원 후 도쿄에서 발행되는 《문예춘추》의 초대 편집장, 선전부장을 지내다 1930년 《모던니혼》의 사장으로 일본사람 직원을 거느리고 발행 부수 10만을 넘는 잡지사를 운영하여 일본 문화계를 주름잡는 한편, 조선 예술상을 마련하여 우리 나라의 문인들을 돕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그는 《어린이》지에 <토끼와 원숭이>를 처음 발표하고 1933년에 다시 연재하다가 3회 치 원고를 압수당하고 더 발표하지 못하게 된다. 이 동화에서 토끼를 원숭이로 만들고, 원숭이의 구호를 외우고 다니게 한 것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을 비난한 얘기라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세 번째 원고는 인쇄되지 못하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토끼와 원숭이>를 발표할 무렵(1931년 9월) 그는 누구보다도 색동회와 소파를 아끼면서도 조선일보에 방정환의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 이즈음에 이르러 그의 작품세계도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933년(29살)에는 옛이야기를 재창작한 <호랑이와 곶감>을 발표한다. <호랑이와 곶감>은 어린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을 미리 생각하고, 또한 어린이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의 말을 선택하여, 민족해방의 의지를 내세우는 주제의식을 살리는 치밀한 구성력을 갖고 있다.
    마침내 마해송의 첫 창작 동화집인 《해송 동화집》이 1934년 개벽사에서 출간된다. 여기에는 동화 <어머님의 선물>, <바위나리와 아기별>, <소년특사>, <호랑이>, <토끼와 원숭이>, <호랑이 곶감> 따위와, 아동극 <복남이네와 네 동무>, <다시 건져서>, <두꺼비의 배>, <독갑이> 같은 작품들이 실려 있고, 뒤에 손진태와 고한승, 진장섭의 서(序)와 지은이의 후기가 실려 있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오랜 원망에서 벗어난 마해송은 1937년(33살) 11월 4일 열 살 아래인 무용가 박외선을 만나 결혼한다. 이 때까지 일본에서 줄곧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던 그는 1944년 6월 동경에 폭격이 심해지자 가족을 서둘러 귀국시키고 자신은 1945년 1월에 귀국한다.

    마해송은 해방 후에도 사회성과 주제의식이 강한 동화를 썼다. 1946년(42살) <토끼와 원숭이>를 재 집필하여 완성하였고, 1948년 1월에는 <떡배 단배>를 <자유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떡배 단배》는 1953년 다른 몇 편의 단편 동화와 함께 책이 되어 나온 후 8년 동안에 다섯 번이나 찍어냈다고 한다.

    자유당 집권 때에는 장편동화 《모래알 고금》(《경향신문》57.9.10 ∼ 58.1.20)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혼란스런 사회 모습을, <꽃씨와 눈사람>(《한국일보》60.1.1)같은 작품으로 부정부패가 극도에 이른 정권이 무너질 것을 은근히 보여 주기까지 했다.

    6·25때에는 전란 당시의 사회상을 그린 장편동화 《앙그리께》를 발표하여 민족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자기인식을 드러냈다.

    1966년 11월 6일 9시 55분 뇌일혈로 사망한 그는 경기도 양주군 금곡 카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The Simple Life
    글쓴이 : 아빌라 데레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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