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양식/감동이야기1

[스크랩] 어느 시골의사의 `유서`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09. 5. 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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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 원문 전문 

                    유서

    어제 날짜 신문에 오길영 상사 부인의 유서가 실렸다.
    그 유서에는 먼저 떠난 남편과의 애틋한 사랑과 먼저 떠난 이를 향한
    애통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유서의 마지막 구절인
    " 마음에 담고만 있자니 터져 버릴 것 같아서~~~.
    함께 있는 것 말고는 욕심내 본 게 없어요! 돈 따위 다 필요 없어요.
    오늘 오늘을 행복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세요.
    내일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오늘만 죽을 힘을 다해 행복해지세요.오늘만. "
    이라는 말은 남은 자들에 대한 충고라기보다는  세상을 떠난 분이 얼마나 그 시절이 그립고,
    얼마나 사랑이 깊었으면 저런 말을 다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거의 8,9 년 전 레지던트 4년차 치프 시절이었다. 
    새벽 2-3 시경 야간 응급수술을 마치고 당직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소아과 레지던트의 전화였다.
    소아과 레지던트는 긴박한 목소리로 "선생님 방금 전에 산부인과에서 프리미 산모가
    아이를 출산했는데 복벽 결손증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얼른 와 주세요."
    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아래 연차를 내려 보냈다.
    잠시 후 3년차와 2년차가 신생아실을 다녀와서 " 선생님 복벽 결손이 맞기는 맞는데요.
    그런데 결손 부위가 커서 수술은 아예 엄두도 못 내겠어요." 라고 보고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고 말하고, 일단 복벽결손 부위를 웻 거즈로 잘 덮어두고 내일 보자고
    하고는 잠이 들었다.
    ( 보호자 입장에서는 억장이 막히는 일이지만, 송구스럽게도 의사입장에서는
    대개 이런 일은 늘상 겪는 일중의 하나일 뿐이고 , 더욱이 응급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치프 수준에서 판단을 내리고 상황을 정리하게 된다.)
    아침 7시쯤이 되자. 아래 연차들이 먼저 환자 치료와 파악을 끝내고 의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의국회의를 하면서 "어제 그 복벽 결손 환자는 어때?" 라고 질문하자, 1년차가 머리를 흔들었다."
    저는 그렇게 결손이 큰 환자는 처음입니다. 디하이드레이션을 커버하지 못하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일단 소아과에서 보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대개 1년차들은 골치 아픈 환자는 서로 환자를 미루려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치프 회진 때 일단 소아과 신생아실부터 내려갔다.
    신생아실은 정말 어떤 면에서는 성스럽기까지 한 곳이다.
    세상에 갓 태어난 수십명의 어린 생명들이 새록새록 숨을 쉬고 있는 곳,
    그야말로 조금도 오염되지 않고, 온갖 권모술수와 삶에 대한 고통으로 가득한
    바깥세상을  아직 한번도 경험 해보지 못한 생명들이 바깥세상으로의 외출을 기다리는 곳이다.
    그곳에 머무르는 단 며칠 동안은 사회적 서열도, 빈부의 격차도 없이 그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동등한 대우와 동등한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소아과 신생아실을 좋아한다,
    나는 레지던트 시절 일이 힘들거나 지칠 때는 가끔 신생아실에 가서 아이들을 보면서
    평화를 얻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외과의사로서의 신생아실 방문은 매번 그곳의 평화를 깨뜨리는 파괴자가 된다.
    이른 아침, 아직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신생아실 특유의 울음소리마저 잠잠한
    시각에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며칠씩 머리를 감지 못해 머리에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외과의사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단체로 들이닥치는 순간
    소리 없이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의 수증기외에는 일체의 움직임이 없던 그 공간이
    갑자기 살벌하고 어수선한 곳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어제 밤 출생했다는 복벽 균열 환자가 누워있는 인큐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에 물먹은 하얀색 거즈가 몇 겹으로 덮여있는 한 어린 생명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순간 아이의 넓은 이마와 붉은색의 입술이 마음을 빼앗아갔다.
    아이의 조막손은 간호사들이 쥐어준 그라스퍼 바를 꼭 쥔 채,
    가끔 두 다리를 배쪽으로 들어 올리면서 "나, 여기 세상에 태어났노라." 는 선언을 하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배를 가린 거즈를 들추자, 그야말로 엄청난 상황이 펼쳐졌다.
    아이는 배꼽에서 명치까지의 복벽이 커다란 타원형으로 결손되어 있었다.
    마치 그림판에서 커다란 윤형자로 명치에서 배꼽사이의 공간을 선택한 다음,
    "잘라내기" 작업을 한 것처럼 어린아이의 고운 피부로 덮여 있어야 할 상복부가 텅비어 있었고,
    배 속의 위장, 소장, 대장들이 그곳을 통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난감했다. 결손부위가 작으면 바로 수술을 해서 장을 배안으로 도로 집어넣고 봉합을 하면 되지만,
    이 아기의 경우에는 양쪽 피부를 당겨 봉합하면 복강의 공간이 좁아져 장이 썩어 버린다.
    아니 아예 그렇게 봉합을 할 수 없었고 장도 제자리에 들어 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도리 없이 머리 속으로는 적정시점에 결손된 자리에 타원형의 고어텍스 패취를 대서,
    복벽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다가 나중에 성장하는 동안 복벽을 계속 늘려서 당겨 꿰매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문제는 수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동안
    밖으로 나와 있는 장을 통해 증발할 수분이었다.
    3년차에게 회진을 맡기고 도로 의국에 올라와서 텍스트를 찾아 보았다.
    미국의 경우와 한국의 사례를 점검해 보았지만 당시로서는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사일로를 만들어서 중력의 힘으로 장이 배속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우선은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장을 배의 중간으로 모아 바셀린을 바른 거즈로 장을 둘러싼 다음
    아이스크림의 콘 모양으로 만들면 중력으로 아래쪽 장부터 배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을 사일로라고 한다.)
    아침 컨퍼런스 시간에 소아외과 담당 스텝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같이 신생아실로 올라갔다.
    소아외과 담당 스텝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이제 문제는 이 아이를 어느 과에서 담당하느냐는 문제가 남았다.
    우리가 담당하기에는 아이의 대사문제나, 전해질 균형문제를 해결 할 수 없고,
    소아과에서는 사일로를 관리 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소아과 소속으로 둔 채 우리가 사일로를 관리하기로 했다.
    그날부터 아래 연차들이 내게 들들 볶였다.
    매일 사일로를 감싼 거즈를 갈아 붙이고, 사일로의 높이를 일정하게 유지시킨 다음,
    하루에 네 번 이상 거즈 주변을 드레싱해서 감염을 막아야 했는데 결국 하급연차들의
    처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전에는 내가 하고, 오후에는 아래 연차들이 하기로 했다.
    아이는 하루, 이틀을 넘어가면서 의외로 잘 버텼다.
    간의 일부를 포함한 배속의 장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아이가
    우유를 빨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배변까지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대개 이렇게 심각한 결손을 가진 아이는 흡입능력이 떨어져서 우유를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럴 경우에는 아이의 경정맥을 천자해서 관을 삽입한 다음, 인공으로 영양 공급을 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아이의 면역기능에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우리는 아이의 변을 관찰하면서 밖으로 나와 있는 장이 하루빨리 배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를 기도했다.
    우리뿐 아니라, 소아과 식구들과 신생아실 간호사들까지 아이의 호전을 기원했다.
    의사도 사람이다. 아무리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희망이 없는 환자보다는
    아무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는 환자에게 더 집착하게 된다.
    처음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던, 아기의 상황이 조금씩 개선되면서 외과, 소아과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아이에게 매달렸다.
    우리 의국 회의에서도 주임교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면서 제일 먼저 하시는 질문이
    " *** 애기 어때?" 라고 할 정도였다.
    아이는 아침저녁 회진시간에 보통 환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외과, 소아과의 주임교수를 선두로 한 수 십 명의 의사들로부터 관심을 한 몸에 모으는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소아외과 주임교수는 미국에 수소문해서 사례를 수집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회복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피워 올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런 이소성 질환의 경우 중에서는 복벽 결손이 그나마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시절에는 아이의 심장이 가슴 밖에 나와 있는 경우를 본적도 있다.
    지방병원에서 갓 태어난 아이가 3시간동안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들어 왔었다.
    응급실에서 전화가 와서 "과장님 애기 심장이 가슴 바깥에 나와 있어요.
    흉부외과로 연락드릴까요? 어째야 할지 몰라서요."
    라는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내려가 보니 갓 태어난 신생아의 심장이
    아직 발그레한 작은 몸 바깥에서 뛰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 아이는 세상 모든 아이가 가슴에 담고 태어나는 심장을 몸 바깥에 달고
    태어나게 되었을까?
    아이의 좌측 가슴으로 1센티도 안되는 작은 틈이 열려 있고, 그 틈으로는 심장과 연결되는
    대동맥 대정맥과, 폐동맥, 폐정맥들이 마치 벽속으로 들어가는 4가닥의 전선처럼
    가슴 속으로 연결되어 있고, 아기의 메추리알 같은 작은 심장은 가슴 밖에서 팔딱팔딱 뛰면서
    애처롭게 박동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과연 이렇게 결정적인 것일까?
    과연 인간의 삶에서 의지적으로 바꿀 수 있는 운명이란 무엇일까?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나, 일생을 호의호식 하면서 사는 사람과
    태어날 때부터 버려지는 미혼모의 아이.
    그리고 이렇게 태어날 때 이미 기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태어난 아이까지
    과연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동전을 던지듯이 결정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물었다.
    계란만큼의 크기도 안되는 작은 어린 심장,
    그리고 그 위에 심장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덮여있는 축축한 거즈 한 장,
    어린 심장은 하얀색의 거즈를 아래에서 들썩거리며,
    마치 이불속에서 장난치는 아이처럼 그렇게 평온하게 뛰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와 의사의 마음은 오히려 그만큼이나 암담한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단 10건 정도만 보고된 적 있는 이소성 심장,
    그때 그 아기는 흉부외과 수술팀에 의해 가슴을 절개하고 심장을 제자리에 집어넣은 다음
    벌려진 가슴벽을 테프론 패치로 덮어주는 수술을 받았지만,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었다.
    과연 이 아이의 일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혹은 열흘을 산 아기와, 1년을 산 아이. 혹은 10년을 산사람, 30년을 산 사람,
    70년을 산 노인의 삶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머리에서부터 발가락까지, 내가 태어나는 순간 심장이 밖에 있지 않음을,
    내 배가 정상으로 붙어있음을, 내 심장에 구멍이 없음을, 내 뇌가 물로 가득 차지 않음을,
    내가 다운 증후군이 아님을, 내가 대사질환이 아님을, 내가 소아암에 걸리지 않았음을,
    지금도 위, 대장, 유방, 혹은 폐나 간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지 않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내 다리가 썩어 들어가지 않고, 지금 내가 췌장암으로 몰핀 주사를 한 박스씩 맞으면서도
    고통으로 침상을 쥐어뜯으며 죽어가고 있지 않음에도 내 삶이 그렇게도 고통스럽고 힘든 것일까?
    과연 내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삶에서 정말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차라리 지금의 상황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에 행복하고, 오늘 행복하고, 지금 이 순간 치열히 살라던
    오 상사의 부인의 유언이 떠오른다,

    아기의 사일로는 서서히 높이를 낮춰갔다,
    아기가 조금씩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사일로의 높이가 조금씩 내려가자, 우리뿐 아니라
    아기의 부모들도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감염 예방을 명분으로 아기 부모들이 아기를 면회하는 것을 강력히 통제했었다.
    하루에 한두 번만 그것도 신생아실 격리창을 넘어서 잠깐 살피는 것만 허락했을 뿐,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아직도 회복기에 있던 아기 엄마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것은 어차피 구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모성본능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배려였다.
    엄마란 심지어 고슴도치를 낳아도 내 배로 낳은 자식이면 그것은 곧 내 목숨이다,
    특히 출산 후의 산모의 경우에는 아이에 대한 강한 모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갓 태어난 신생아가 아기 엄마의 품을 떠나야 할 상황이라면 가능하면 접촉을 줄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아기의 상태가 좋았다,
    대개 장이 바깥에 나와 있으면, 장 표면을 통해 수분이 증발한다.
    때문에 미끄러운 점액으로 코팅되어 있어야 할 장이 마르기가 쉽고,
    그렇게 되면 연동운동을 해야 하는 장의 기본적인 운동이 떨어지면서 장기능이 사라진다.
    아울러 장의 표면을 통해 증발하는 수분과 전해질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성인의 경우라면 하루 몇 리터의 물이 열린 복강과 장을 통해 증발해버린다.
    그런데 아기는 증발량과 우리가 투입해야 할 양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너무 많은 수분과 전해질을 주어도 독이 되고, 적게 공급해도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소아과에서 담당한 아기의 전해질과 수분 대사조절이 원활했다.
    우리도 행여 1cc의 물이라도 덜 증발시키기 위해 장을 감싼 거즈위로 바셀린을 바르고,
    그것도 불안해서 실바딘이라는 화상처치용 연고를 몇 겹으로 발라서 수분이 증발할 통로를 막았다.
    아울러 장기간 복강이 노출됨으로서 생기는 감염을 막기 위해 장 주변을 하루에 몇 번씩
    드레싱을 했다.
    이렇게 아기가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열흘을 견뎌가자,
    이젠 온 병원 식구들의 염원이 아기에게 모아졌다.
    병원 종교서클에서는 아기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병원 직원들도 우리 팀을 만나면 첫 마디가 "용희 어때요?" 라는 것이었다.
    아기는 처음에 이름이 없었다.
    출산 후 어차피 생명의 연속성을 유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들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기가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사일로의 높이가 낮아져 가면서 모두가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2주째 되던 날 아기에게 ‘용희’라는 이름이 생겼다. 용희의 부모님은 그야말로 모성과
    부성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용희 아빠는 매일 밤을 소아과 신생아실 앞 보호자 대기실 벤치에서 잠을 잤다,
    용희 엄마도 산부인과에서 퇴원하자마자, 아빠와 같이 신생아실을 지켰다,
    우리가 부모를 찾을 일이 있으면 부르겠노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지만,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는 당신들의 자식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아빠는 아침에 병원에서 출근하고 병원으로 퇴근했고, 엄마는 아예 병원에서 생활했다.
    이렇게 무려 10번의 거듭된 실패 끝에 시험관으로 성공한 아기의 운명은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피를 말렸다.
    우리도 차차 생각이 바뀌었다.
    회생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 이제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2주가 지나서 용희라는 이름을 얻으면서부터는 보호자들의 출입을 허락했다.
    아니 그뿐 아니라, 예외적으로 보호자의 신생아실 무상출입까지 허용했다.
    출입시에 에어샤워를 반드시 거치고, 가운을 입고, 스크럽을 한 다음 출입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어쨌건 하루 종일 문 앞을 지키고 앉아 있는 부모들의 염원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기 옆에서
    아기를 지켜보는 것이 아기에게도 힘이 될 듯도 싶었다.
    아기 엄마는 카톨릭 신자였다,
    아기 엄마는 내가 강력하게 만류했음에도, 어린 용희의 손에 묵주를 쥐어 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거의 애원을 했다. 우리는 아무도 그것이 아기를 위해 작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용희 엄마의 그 강한 믿음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용희 엄마가 가져온 나무 십자가가 달린 작은 목주가 병원의 EO Gas 소독기에 돌려서
    멸균을 이 된 다음 용희의 가느다란 손에 쥐어졌다.
    신생아의 그라스퍼 반응 때문인지 용희는 24시간 그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나중에는 우리들과 용희 부모님이 한 팀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3주를 지나면서 사일로의 높이가 1/3으로 낮아졌다,
    태아시절부터 복강의 바깥쪽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용희의 장기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제 이렇게 버티는데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대사가 증가하면서, 인위적인 TPN 으로 아기의 필요량을 공급하는데
    한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아무리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무균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벌려진 복강내로 일어 날 수 있는 오염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 결단을 내릴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일단 장이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기다린 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판단에, 아직도 배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은 장을 중간으로 모은 다음 벌려진 복강을 패취로 덮어씌우기로 했다.
    고어텍스 패취를 벌어진 복벽 위에 대고, 꿰매면, 덜 들어간 장 부분은 아직 불룩하게
    남더라도 그 위로 고어텍스가 덮이면 정상적인 복강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일단 그렇게 해서 한두달 지나면서 아이가 성장하면서 복벽도 좀 늘어나고,
    나머지 덜 들어간 장도 배안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 패취를 제거하고,
    복격을 서로 연결해주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는 이 결정의 전 과정을 보호자에게 공개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했다.
    용희의 부모님들은 이미 우리와 한 팀이었던 것이다.
    출생 한 달째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 자체는 간단했다.
    아직 배위에 밀려나와 있는 나머지 장을 중간으로 모으고, 그 위를 보자기처럼 고어텍스
    패취로 감싼 다음 벌어진 복벽에 타원처럼 고어텍스를 꿰맸다.
    이제 남은 건 장이 그 압력을 견뎌내는 것과 감염을 막는 것 두 가지 뿐 이었다.
    수술 후 모두의 촉각이 곤두섰다.
    신생아실에는 다시 보호자의 출입이 금지되고,
    우리들도 신생아실에 출입 할 때마다 매번 에어샤워와 스크럽을 해야 했다.
    아이는 수술 첫날을 비교적 무사히 잘 견뎌냈다.
    소변양도 원활하고, 심장이나 폐기능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장운동이 돌아오지 않았다.
    첫날, 둘째날을 지나도 청진기를 통해 장의 연동운동이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운동양이 없이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는 어린 아기의 몸에서
    장이 자기의 리듬을 찾는다는 것이 무리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우리 팀 전원이 돌아가며 청진기를 배에다 대 보았지만, bowel sound 는 들리지 않고,
    오히려 장이 멈춰 있을 때 들리는 개스 역류음만 들렸다.
    포터블 엑스레이를 불러서 방사선 촬영을 해봤지만, 사진 결과역시 air fluid level 만
    무수히 나타나고 생선가시 모양의 헤링본 사인만 나타났다.
    이것은 장이 폐색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지한 토의가 계속 되었다.
    우리는 ambulation이 되지 않아 적절한 운동부족으로
    장운동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늦어진 것일 뿐일 가능성과, 억지로 복강으로 들어간 장의 일부가
    배 바깥에서 자유롭게 있다가, 패취내에서 압박되어 허혈이 일어나거나 꼬였을 가능성을 두고
    고민했다. 4일이 지나가자 초조해졌다,
    우리들도 초조하고, 용희 엄마의 눈빛에서 불안정한 빛이 감돌았다.
    심지어 수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보면 농담을 주고받던 용희 엄마는
    말을 더듬을 정도로 극도의 초조함에 사로 잡혔다.
    수술 후 5일째 장운동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용희의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결국 결정을 내려야했고, 이번에는 여유가 없었다.
    용희의 어린 몸은 다시 수술실로 옮겨졌고 우리는 벌어진 복벽을 덮고 있던
    고어텍스 패취를 제거했다.
    패취를 제거하자, 지난 5일간 연동운동을 못해서 개스가 가득 차 버린 장들이
    마치 수소가스 충전기로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소장들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면서
    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장연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연적인 개스 배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장내 세균에 의해
    발생되는 개스가 장에 고이면서 그것이 장으로 오는 혈관을 압박하게 된다.
    황급히 장을 옆으로 치우고, 장간막쪽을 살펴보자, 장간막에서 소장쪽으로 가는 혈류가
    눌려있었고, 아이의 회장부위가 약 20센티정도 시커멓게 괴사가 일어나 있었다.
    치명적이었다.
    우리는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용의의 썩어버린 장을 커다란 거즈로 감싸고
    조심스럽게 절단했다. 양쪽을 절단하면서 혹시나 괴사된 장 내용물이 다른 곳을 오염시킬까봐
    식은 땀을 흘렸다. 괴사된 장내에서는 혐기성 세균이 자라있어서 이것이 복강을 오염시키면
    성인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린 아기의 겨우 새끼손가락 굵기 밖에 되지 않는 소장이 절단되고
    다시 건강한 부분끼리 이어 붙여졌다.
    문제는 소장을 이어붙인 다음이다.
    용희는 다시 사일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경우에는 이어붙인 장이 압박되어 연결부위가
    녹을 수가 있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용희의 장들은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다시 배위에 넓게 펼쳐진 채로 나 나와 있고,
    우리는 그 위에 식염수를 묻힌 거즈를 덮고 계속 수증기 증발을 막아주면서
    하루빨리 이어진 장이 붙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용희 엄마는 거의 식음을 전폐했다.
    보다 못한 2년차가 억지로 응급실로 데려가서 수액을 맞혔을 정도로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기도는 계속 이어졌고,
    우리는 그 상황에서 아무도 그녀를 제어 할 수 없었다.
    아기가 울음을 잃어 버린지 일주일이 흘렀다. 용희는 더 이상 울 기력도 없어보였고,
    상태는 조금씩 나빠졌다.
    금식이 이어지고 경정맥을 통한 인공영양의 한계치는 점점 코앞으로 다가왔다.
    혈액검사상 각종 수치가 현저히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삼일 후, 용희가 고열에 시달렸다.
    검사 결과는 백혈구의 급증과, 혈소판의 감소, 전형적인 패혈증 초기 징후였다.
    강력한 항생제가 어린 용희의 혈관을 타고 흘러 들어갔지만, 몸에 점상 출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긴급으로 혈소판이나 신선 혈장을 공급해야 했는데, 가능하면 갓 채혈한 혈액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의 삼투압과 단백질, 혈소판을 유지 할 수 없었다.
    용희 아빠와 엄마가 둘 다 AB형이고 용희는 B형이었다.
    혈액형이 매치는 되지만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우리 1년차가 팔을 걷었고, 용희에게는 우리 1년차가 헌혈한 신선 혈장과 혈소판이
    투여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용희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용희 엄마와 아빠는 숨을 죽이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뿐이었다.
    그날 오후, 용희 엄마가 용희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고 이름표를 갈아달라고 했다.
    아기 이름이 '조용희' 여서 아기가 울지 않는다고,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서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마음이야 그런 미신적인 부분까지 걸리는 것일 테지만,
    용희 엄마의 상태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던 우리는 그냥 쉽게 그렇게 바꿔 달아주고는
    엄마의 그런 불안정한 감정 상태는 그냥 흘려버리고 다시 아이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용희는 수혈을 시작하기 전날부터 상태가 급격히 불안해졌다.
    호흡은 가빠지고 맥박수는 무서울 정도로 증가했다.
    피부가 거칠어지고, 작은 점상 출혈반들이 온몸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시간당 소변량이 감소하는 것이었다.
    소변량의 감소는 온몸으로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용희는 그날 저녁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뒤로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아기의 손가락과 다리를 들어 올리며
    배내미소를 짓던 그 맑은 미소와 가냘픈 숨결이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용희를 괴롭힌 복벽을 제대로 닿아주고 싶었지만,
    용희의 가냘픈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춘 이후로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 줄 수가 없었다.
    어린 용희의 배는 감염으로 인해 농이 들어찼고 역겨운 냄새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배속을 다 씻어서 억지로 당겨서라도 봉합해주고 싶었지만
    죽은 아이를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패취를 배위에 대고 마치 이불을 덮듯 그 야속한 장들을 가려주는 것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린 영혼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용희의 왼손에는 그동안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나무 십자가와 묵주가 다시 쥐어졌다.

    우리는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차라리 사일을 끌지 말고, 장운동이 돌아오지 않을 때 재수술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나치게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용희를 놓친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아이는 죽었고 이제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죽을 만큼 술을 마셨고, 우리중의 몇몇은 눈물을 보였다.
    용희가 영안실로 내려가고 용희 아빠가 의국으로 나를 찿아 왔다.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용희 때문에 애써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아내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같이 인사를 드리러 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달이 넘게 신생아실에서 밤을 새며, 그렇게 간절히 아이의 회생을 기도하던
    바로 그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머리를 숙였다.
    너무 면목이 없었다.
    나도 그를 쳐다볼 면목이 없었고, 너무 후회스러웠다.
    머지 않아 우리는 그를, 그리고 용희를 잊고, 다시 전쟁터로 뛰어 들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우리에게 용희는 그 수많은 전투에서 입은
    하나의 상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는 그것이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한 달간 같은 길을 갔던 사람들의 길은 그렇게 갈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일주일간 아침 회의 때마다 모두를 한숨짓게 만들었던 용희 이야기도 이제 서서히 잊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의국으로 편지가 왔다.
    인턴 선생이 우편물을 가져다주면서 "선생님 이분, 용희 어머니 아니세요.?"
    인턴 선생이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그 이름이 용희 어머니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던 모양이다. 
    나도 그런가보다 하고 봉투를 열었다.
    "선생님. 그동안 우리 아기를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우리 아기가 세상에 나서
    엄마 젖 한번 못 빨아보고, 그렇게 끔찍한 병을 앓다가 죽었지만,
    선생님들이 잘 보살펴 주셔서 아마 여한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서 엄마 품에 한 번 안겨보지 못한 아기가 너무 불쌍합니다.
    저라도 옆에 있어 주지 않으면 우리 아기가 너무 외로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살펴주신 은혜 저 세상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용희 엄마가 전날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우리는 용희가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용희 엄마를 주의깊게 관찰하지 못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아이 엄마가 죽고 나서야
    모두들 ‘그때 용희 엄마가 정신적으로 많이 불안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두 명의 생명이 그렇게 허무하게, 아쉽게, 억울하게 떠나버린 것이다.
    오상사 부인의 유서.
    또 용희 엄마의 유서.
    나는 그것을 쓰는 분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의 사랑과 그리움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유서는 그저 그런 한 장의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극한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피눈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남기고 떠나간 분들의 그 간절함이 세밑에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 든다.
    그럼에도 나는 혹은 우리는. 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증오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이 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결국 돌아보면 온 세상은 사랑인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게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2004년의 마지막 날에        시골의사

 

출처 : 2008년1기중등교장연수
글쓴이 : 白眉(김기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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