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 내가 있다
이덕진 / 효원고등학교장
‘책을 읽어라.’는 말은 ‘밥을 먹어라.’는 말보다 더 많이 들어왔고 나 또한 되풀이 해 온 말인 듯합니다. 유년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활을 학교와 그 언저리에서 이어왔으니 책과는 뗄 수 없는 삶이었으며, 그래서 오히려 독서를 쉽게 권장할 수도 있을 법한데 막상 글로 옮기자니 참으로 난감한 마음, 숨길 수 없습니다.
40여 년을 학교 선생님으로 있으며 우리 학생들에게 독서를 권장해 왔고, 그 학생들이 이제 대부분 부모가 되어 있을 텐데 그들이 지금 책을 얼마나 읽고 있으며, 그 아들딸들에게 얼마나 책 읽기를 권하고 있는지가 선뜻 자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요즘 세상은 활자보다도 더 많이 영상과 만나게 됩니다. TV나 인터넷을 열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보고 듣게 됩니다. 인터넷을 클릭하면 세상에서 지금 막 일어났던 일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집니다. 끝 모를 지식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런 소식들과 지식들을 듣고 흡수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는 빛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갑니다. 이런 속에 독서의 감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 난감한 마음의 또 다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면 연기를 내뿜으며 폭설이 쌓인 광활한 대지를 뚫고 지나는 기차의 장관이나 이 영화의 주인공 ‘지바고’와 ‘라라’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는 막이 내린 후에도 심영으로 남습니다. 영상이 주는 매력입니다. 하지만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심리나 고뇌는 영상이 모두 쫓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주인공을 만나 슬픔과 분노 또는 기쁨에 감정이 이입됩니다. 고요 속에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간접적인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새로운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책이 주는 여운은 영상이 주는 잔영보다 가늘고 길게 이어집니다. 이렇게 여러 주인공들을 만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인생이 깊어진 느낌을 머금게 됩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 입시와 논술을 강조하며, 「삼국지」는 논술력의 향상을 위해 많이 권장하는 도서입니다. 청소년기에 「삼국지」속에 펼쳐진 삶과 굴절을 보며 온 밤을 지새웠던 기억은 논술이라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펼쳐진 주인공의 삶을 같이 했던 기억으로 있습니다.
「삼국지」속에 ‘유비’는 좀 답답함을 주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여 어떤 일을 결정 할 때는 우유부단한 느낌마저 줍니다. 하지만 그는 하찮은 인연도 소중하게 여기고 당장 손해가 올 것을 알면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삼국지」에서 만난 ‘유비’는 이후로 내게 참으로 많은 일깨움을 준 인물이 되었습니다.
낡은 종이 냄새가 풀풀 나고 깨알 같은 글씨가 빡빡하게 채워진 그 「삼국지」는 지금도 만화로, 영화로, 또는 새로 소설로 엮어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만화와 영화가 「삼국지」에 나오는 인간 내면의 그 복잡하고 오묘한 심층을 들여다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다 해도 영상이 문자를 따라 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행간을 따라가면서 사고하게 되고 사고를 통하여 성찰하게 되며 성찰은 행복에 이르는 문을 가르쳐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이고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왕자의 말은 그래서 중요한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은 책 속에 있습니다. 책 속에 내가 있습니다.
( 2009. 9. 30. 경기도립도서관 계간지, <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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