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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원화성(읍성) - 세계문화유산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13. 3. 11. 12:41

 

 

수원화성 - 세계문화유산

읍성(邑城)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달문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세계유산적가치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수원화성의 역사적 의의
새수원은 출발부터 실학과 연결된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 사상이 새수원의 길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하였다.
더구나 시대적인 흐름은 실학 정신을 현실에 투입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또한 상업과 농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 구조의 재편성은, 그때까지 조선을 이끌어왔던 성리학을 지극히 공리공담적인 구학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정조는 아마 수원화성을 조선 실학의 실습장으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국가의 통치 전반에 활용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부류의 반대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걸림돌이다.
또 기득권층의 저항도 충분히 예상된다. 이 모두를 피해가면서 현실에 적응시키는 방법으로도 수원화성을 건설했을 것이다.

기계나 기구의 개발과 활용은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경비를 절감하면서 공역 기간을 단축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원화성축성 이야기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 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ㆍ

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 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 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 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 분 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팔달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은 팔달문 밖의 남시장(일명 성밖시장, 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이렇듯 정조대왕의 애정과 특혜 덕분에 수원에는 많은 외지인들이 이주를 해오는데 특히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원으로 이사를 해와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다.

이 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 줬다고 해서 보시동(普施洞)이 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이 상공업 뿐만 아니라 농업 진흥 정책도 적극 추진하였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수원화성시설물 소개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長安門)·팔달문(八達門)·화홍문(華虹門)·장악당(長樂堂), 북동(北東)·북서포루(北西砲樓),

봉수당(奉壽堂)·낙남헌(洛南軒)·서장대(西將臺)·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강무당(講武堂)·북옹성(北甕城)·북포루(北鋪樓)·

남암문(南暗門)·적대(敵臺)·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蒼龍門)·남공심돈(南空心墩)·

화서문(華西門)·남수문(南水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북암문(北暗門)·동북노대(東北弩臺)·

서포루(西砲樓) 등을 갖추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
수원 화성 축조 이유: 수원 화성은 효심이 많은 정조가 당쟁 때문에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의 팔달산 아래에 성을 축조한 것입니다.

 

수원 화성의 축조 시기: 수원 화성은 정약용이 1793년 쓴 "성화주략"을 토대로 채제공과 조심태의

지휘 아래 1794년 시작해서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수원 화성의 크기와 시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 화성의 특징: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수원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유와 가치: 수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입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출처 : 비나리투어
글쓴이 : 신희정/비나리투어/01024157500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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