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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디슨과 파스퇴르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10. 2. 9. 11:19

에디슨과 파스퇴르

 

우리나라 과학 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중간 진입 전략’이 아닌가 싶다. 과학에 투자해 결실을 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투자한 나라가 결실을 본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이 말은 과학 전반에 대한 투자는 미국 같은 선진국이 하도록 맡겨 놓고 우리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돈이 될 만한 분야가 나타나면 그때 집중적으로 투자해 상대보다 먼저 상품화하자는 뜻이다. 약삭빠르다 하겠지만 우리 같은 후발 주자에게는 어쩌면 적합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반도체를 비롯해 상당수의 우리나라 기업이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기술 발전이 이런 의도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단타성 정책은 지적 호기심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발전돼야 할 과학을 단순히 먹고사는 것의 해결 수단으로 전락시켜 보편적 가치로서의 중요성을 망각시킬 수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원로 한 분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연구를 ‘새로운 자연현상을 밝혀내는 것(창의성)이냐, 아니면 당장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실용성)이냐’에 따라 나눈 파스퇴르의 4상한(Pasteur’s quadrant)을 소개했다. 이 도표에는 또 각 구간을 대표하는 과학자들이 표시돼 있었다. 창의성이 높은 구간에는 원자의 구조를 발견한 닐스 보어, 실용성이 높은 구간에는 토머스 에디슨, 그리고 실용성과 창의성이 모두 높은 구간에는 세균학의 아버지이자 각종 백신을 발명한 루이 파스퇴르가 자리 잡고 있었다(그림).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하니까 응용과학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와 함께 대학은 기초과학에, 정부출연 연구소는 응용과학에 힘써야 한다는 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많은 정부출연 연구소의 모체가 된 한국과학기술원도 1960년대 외국 기술을 베껴 와서라도 우리 기업들에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졌다. 즉 ‘에디슨형’ 연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이제는 필요한 연구개발은 기업 스스로 할 수 있게 됐고, 그 바람에 출연연구소가 할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정부는 요즘 그들에게 ‘파스퇴르형’ 연구개발을 독려하고 있다. 기초과학에 인색한 이유는 보어의 연구가 비록 창의적이었지만 실생활에 도움이 되기 시작한 것은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날 나노기술이 각광받은 뒤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부지만 100년 뒤까지 내다보고 과학기술에 투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소 이해는 간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창의성도 높지 않고 실용성도 명확지 않은 연구를 ‘다윈형’으로 분류한 것이다. 사실 다윈은 거대한 실험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종의 기원』을 썼다. 논리적 사고와 함께 관찰과 실험은 과학의 근본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제 대부분의 연구가 여기에 속하며 초기에는 그 연구가 얼마나 실용적인 가치를 창출할지 일반적으로 알 수 없다. 마침 올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이어서 전 세계에서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타임지는 진화론을 ‘인류가 생각해 낸 최고의 아이디어’라고 했고 그 파급 효과는 생물학을 뛰어넘어 모든 학문 영역에 미치고 있다. 중간 진입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분야를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폄하한다면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된 정책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상묵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

출처 : 이철우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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