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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시조 모음 -시조문학진흥회 참조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10. 9. 18. 11:11

정철 시조 모음.

내 마음 베어내어 저달을 만들고자
구만리 장천에 번드시 걸려있어
고온님 계신곳에 가 비춰어나 보리라


나의 마음을 베어 내어 저 달을 만들고 싶다. 그리하여 높고 먼 하늘에 번 듯이 떠 있으면, 임금님이 계신 곳을 훤하게 비추어 드렸으면 한다

정철의 선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 글이다. 워낙 강직한 성품에 타협을 몰랐던 정 철이 많은 적을 만들 고 유배되기를 수 차례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선조에 대한 섭섭함이나 하소연이 섞여 있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할 것 같다.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꺾어내어 임계신데 보내고자
임이 보신후에야 녹아지다 어떠리

소나무 숲에 눈이 쌓이니 그 모습이 마치 꽃이 된 듯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혼자 보기가 죄송하니, 한 가지를 꺾어서 임 계시는 곳으로 보내드리고 싶다. 임께서 보신 다음에야 녹아진들 어떻겠는가..

역시 이 글도 임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이 가득하다. 흰 눈은 아마도 깨끗한 작자의 마음을 비유하여 자신의 옳음을 임에게 전하고 싶은 연군의 정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도 병이드니 정자라도 쉴이 없다
호화히 섰을때는 올이갈이 다쉬더니
잎지고 가지 꺾은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나무도 병이 들면 정자나무라도 그 그늘 밑에서 쉴 사람이 없구나.
나무가 무성하여 호화롭게 서 있을 때 오는 이 가는 이 다 쉬더니,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인 후에는 새 마저도 앉지 않는구나

세상인심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권력과 명예를 쫓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탄식하고 애석해하는 그러면서 권력이나 명예의 무상함을 풍자하고 있다. 신의나 도덕이 점차 묻혀져 가는 오늘의 우리들이 되새겨 보고 음미해 봐야 할 시조가 아닌가 싶다.


새원 원주되어 시비를 고쳐닫고
유수청산을 벗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에 손이라거든 날 나갔다 하여라


신원의 원주가 된 뒤 사립문을 다시 닫고,
흐르는 물과 푸른 산을 벗삼아 내몸을 그 속에 맡겨 버렸노라
아이야 만일 벽제를 거쳐서 오는 손님이 와서 나를 찾거든 나갔다고 일러라

새원(新院) : 고양군에 있는 원
시비(柴扉) : 사립문
벽제(碧蹄) : 고양군에 있는 역원(驛院)

이 시조는 신원의 院主(원주)로 있을 때 지은 3연의 연시조 중에서 마지막 연이다. 원주라는 직책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했던 작자의 심경을 노래한 글이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저멋거니 돌히라 무거울가
늙기도 설웨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머리 위에 이고, 등에 짐을 진 저 늙은이 그 무거운 짐을 나에게 넘겨주시오. 나는 아직 젊었으니 돌인들 무겁겠오. 내 가져다 드리리다. 늙은 것만도 서러울 터인데 짐까지 지고 다니시다니.

사람이란 세상과의 교통을 끊고 홀로 살아가노라면 석가모니와도 같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정 철이 이 시조에서 느끼는 무상은 종교의 세계로 가 버리지 않고 행동으로 이를 도움으로써 마음의 충족(充足)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 주려는 충동을 느끼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다르다.


말로만 짐을 날라다 주는 그러한 참새가 아니라,자기 어깨와 등을 내밀음으로써 그 노인이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가져다 주면서 나누는 이야기에 자기의 피로도 잊어버리는 인간성의 진면목(眞面目)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정 철은 좋은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원초적인 동심을 기초로 한 직선형(直線型)의 인간이었음을 이 시조는 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서 나라의 경륜(經綸)을 펴던 그가 이만큼 평민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절대적이었던 당시로선 실로 찾아보기 힘든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아들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늙은 나이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또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 정철은 이러한 광경 앞에서 어진 임금이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가슴을 앓듯이 어딘가 괴로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슬픔이라고 즉각 단정하는 인간성, 말하자면 타인과 자기와의 사이에 별다른 거리를 느끼는 일없이 만인을 위한 만인의 감정,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자 행동으로 알고 있는 정 철이었다.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고
어와 저 아자바 옷 없이 어찌 할고
머흔 일 다 일러사라 돌보고저 하노라

이 작품 역시 훈민가 중의 하나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이 작품은 정 철의 훈민가(訓民歌) 중의 하나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 효도를 다 하여라. 돌아가신 뒤에 슬프다고 울기만 하면 무엇 할 것인가. 사람 한 세상에 태어나서 돌이키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효도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효(子孝)를 가르친 작품이다.

부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받들어 모시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이를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아가신 뒤에 말로만 후회를 하지 말고,차라리 살아 계시는 동안에 걱정을 끼치지 않고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이끌어 드리도록 마음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 계시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아들딸들은 노력해야 하겠다고 강조하는 하나의 경구(警句)의 형식으로 이 시조는 효도를 강조하고 있는것이다.

말하자면 인생 무상(無常), 바로 어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느끼는데 어느새 무덤 입구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중생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시간이 유수보다도 더 빨리 흘러가니 정신을 부모에게 돌려, 자신이야 어떻든 간에 아픈 데를 살펴 드리고, 잡수시고픈 음식을 장만해 드려 몸과 마음을 평안케 해 드리는 것이 다시 없는 효도의 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위인이 어떻게 나라를 위한 인물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유교에서 보는 인격 측정의 한 기준이었다. 세월이 가기 전에 효도를 하여,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공백이 없도록 타이르는 정 철의 이 시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심금 을 울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몸이 살았으랴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에다 갚을가


지은이는 훈민가의 맨 첫머리에도 시작하여 부모에 대한 자효(子孝)는 인륜(人倫)의 기본이며 대강(大綱)이란 것을 역설하였다.


재 넘어 성 권롱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희야 네 권롱 계시냐 정 좌수 왔다 하여라

성권롱(成權農) :권농은 지방에서 농사를 권장하는 유사(有司) 친구였던 성혼을 가리키는 말
언치  안장 밑에 까는 털 헝겊

제 넘어 성 권농네 집이 있는데, 그 집에서 담근 술이 익었다는 기별을 어제 받고,
누워서 반추(反芻)를 즐기고 있는 소를 발로 차 일으켜 언치만 놓아 눌러 타고,
성 권농 집에 이르러 아이를 불러 이르기를 정 좌수가 왔다고 일러라.

유배지의 생활의 일단이 이 시조 속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말없이 입을 다물고 보내는 세월 속에서도 인간 정철은 우거(寓居)를 걷어 차고, 마을의 지방에서는 유일한 지식인인 권농 벼슬 을 하는 성씨 집 문을 두드리기를 유일한 낙으로 삼은 것 같다.

정 좌수가 왔다고 하인에게 외치는 소리부터가 얼마나 유쾌한가 그만큼 성 권농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권농은 또한 정 철의 인간 됨을 알아보고, 그를 모실 줄 아는 위인이었기에 정 철의 말벗, 술벗 구실을 다 했을 것이 이 시조를 음미 해 보면 저절로 짐작이 되어 우울한 구름이 끼지 않는다.

대문간에 서서 '이리 오너라'를 부르기보다는 '아희야 정좌수가 왔다고 일러라'하는 말씨부터가 정 철의 평민 정신이 스며 나온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서 우선 호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마음놓고 아이를 아이라고 부를 만큼 정 철은 인자한데가 있고,아이와 얼마나 다정하게 지냈는가 하는 내력이 그 말속에 묻어 있어서 좋다.

많은 작품을 남겼던 정철은 이조중기 정치가이면서 시인이었다 그의 임금에 대한 남다른 충성은 어릴 때부터 궁중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그래서 궁정에 대한 짙은 향수 때문이라고도 한다. 학식도 뛰어났던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결백하고 곧은 성격은 많은 사람들과 부딪쳤고 왕과도 부딪쳤다.
 
의견대립이 있을 때에는 국왕앞이라도 상대방을 가차없이 공격하여 주변에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정치생활은 평탄하지 못했으며 항상 주변이 시끄럽고 그를 모함하는 무리들로 잠잠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명작.. 관동별곡은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당시 관내를 돌아보며 지은 것들인데 금강산의 빼어난 경관을 그려놓은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고전문학의 최고 걸작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한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들은 그가 의지하던 율곡이 세상을 뜨고 나이 50이 되던 해 임금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에 의해 추방되다시피 고향으로 돌아와서 쏟아놓은 노래들이다. 말하자면 고관대작(高官大爵) 위에 군림했던 정 철이건만, 한 이웃 할아버지로 아이들과 다정히 지내는 풍모가 있어 이 시조는 정 철의 동심마저 엿보이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