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거사의 여행기/여행자료

[스크랩] 성곽의 꽃, 화성(華城), ①장안문에서 화홍문까지 걷다.

백당 - 백세까지 당당하게! 2010. 5. 13. 10:49

 성곽의 꽃, 수원화성 따라걷기

一, 장안문~화홍문 

 

역대의 걸작, 수원화성을 걸어 봅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인류문화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임과 동시에

전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임을 세계인이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의 것, 조상들의 슬기가 그대로 담긴 성(城),

그 길을 지금부터 천천히 따라 걸어봅니다.

 

 

장안문(長安門)

 

봄, 신록의 계절 5월이다.

말 그대로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 온것이다. 봄소식을 알리는 매화와 벚꽃의 상춘객들을 뒤로 하고,

이제부터 불과 10일, 1년중 가장 아름다운 초록의 빛이 만들어 지는 시간이다. 녹색의 진한 그 빛도 아니요, 힘없이 늘어진 연두빛도 아니다. 오묘한 푸르름, 5월의 초입에는 그 빛이 살아있다. 이때는 산도 좋고, 들도 좋다. 떠남의 여유가 없는 바쁜 마음을 가진이들도 지금이면 가까운 어느길을 걷더라도 그 곳은 봄이되고, 편안함이 되고, 여행이 된다.

 

봄빛햇살 가득 받으며 나선길, 수원 화성이다.

우리네 조상들의 땀과 인내, 그리고 슬기와 지혜가 모두 모인 역사적 건축물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화성은 그 어느것 보다 과학적이었으며, 도시계획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화성축성의 의미, 그것은 성을 축성하면서 민본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당시의 이전과는 많이도 달라진 인부들에 대한 대우였으며, 철거민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선생(茶山 丁若鏞, 1762~1836) 의 거중기와 수차의 실용화가 성의 축성기간을 단축 시켰으며, 연암 박지원선생(燕巖 朴趾源, 1737~1805)과 초정 박제가선생(楚亭 朴齊家,1750~ 1805)의 농업론적 연구에 의해 저수지등의 수리시설을 두면서, 대유둔등의 시범농장도 설립하는등의 농업이 획기적으로 발달이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화성축성은 민본주의적 사고의 결정체다.

화성성역의 축조는 도시건설이며, 군사시설물이라 할수 있다. 그 축조에 대한 노동력은 곳런히 민초들의 몫이 될수 밖에 없다.

회성축조 이전의 나랏일은 호역(戶役 : 한 집안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부역)이나 승군 징발(강제 징발)이었다. 쉽게 말한다면 나라에서 시행하는 공사의 일은 노둥의 댓가가 없었으며 오직 충성심에 의지한 강제노동이나 다를리 없었다. 화성을 축조할 당시에고 조정의 중신들은 정조에게 이러한 의견들을 보였으나 정조는 이를 거부하고 위민정책(爲民政策)으로 밀고 나간 결과물이 지금의 화성을 있게 한 결과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면서

성역에 종사하는 실무자와 부역꾼에게 더위를 이길수 있는 구급용 환약인 제중단과 척서단을 내어 주어 질병과 더위를 이길수 있도록 하였으며, 당시 여름 극심한 가뭄이 들자 이래적으로 나라의 공사를 일시적으로 중단 시키기도 했다. 축성의 서두름보다 왕의 독려와 배려로 함리적인 인력의 운용으로 성과을 보다 튼튼히 쌓으려는 정조의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동짓달전에 추위를 대비한 털모자와 무명을 준비해 장인들에게 모자 하나와 무명 1필씩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는데 호궤( )라 하여 성의 축조가 마무리 될때까지 모두 11차레에 걸쳐 치뤄졌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상부상조의 정신속에 뿌리 깊게 박힌 정성의 표시로 지금으로 따지자면 한달 한번씩 있는 회식(會食)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전과는 가장 다른 점 한가지, 그것은 임금지불이었다.

화성축 과정에 투입된 인원은 만만하지 않았다. 기존의 강제성을 띤 부역과는 달리 기술자와 잡역부 모두에게 임금을 지물토록 한 것이다. 정해진 기간동안의 일에 나랏일, 거기에 임금까지 받을 수 있다면 민초들에게는 가장 좋은 일일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니 화성축조에 많은 인원이 몰리게 되고 농민은 물론이고 기술자와 장인들이 모여 들었으며, 실학자들의 지식인들이 모이게 되었고, 거기에 예술인들까지 합류하면서 당대의 모든 국력이 집약되던 역사적인 성곽의 축조가 되는 것이다.

 

화성여행의 첫 걸음, 장안문에서 시작한다.

장안문(長安門), 화성의 북쪽에 해당하는 문으로 사실상 화성의 정문이 된다. 웅장한 모습의 장안문의 안으로 들어서면 문 입구와는 다른 조용한 역사의 숨결이 들린다. 관광안내소를 잠시 들리고는 장안문에 올라 화성여행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홍이포와 북동적대를 지나 북 동치를 지난다. 아랫길로 내려서 화홍문으로 오르는 길을 따른다. 수원천의 상류로 향하는 길, 아침나절의 빛임이에도 5월 봄빛의 기운은 더운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걸음마다 느껴지는 더운 기운은 시원한 분수와 흐르는 물줄기에 마음과 몸을 내놓게 된다. 자유스럽게 노닐던 오리들도 잠시 낯잠에 취해 있는 길, 아직 이른 계절임에도 물길에는 아이들이 뛰어 들어 성급한 물장난에 여념이 없다. 그 모습에 한참을 넋놓으며 부러워 하다가 다시 옮기는 발걸음 북수문에 닿는다.

북수문의 마루에 앉은 비둘기들의 모습이 한가하고 솔솔 불어 오는 봄바람도 한가하다.

 

화성의 첫걸음 여행,

화성의 역사와 의의, 그리고 우리네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하나씩 들어보며 길을 걸으려 한다.

볕 좋은 5월의 밝은 하늘,

눈이 부셔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새우눈을 하며 파랗게 질린 하늘도 바라보는 여유를 누리며 성과의 길여행을 떠난다.

 

 

 장안문(長安門)

화성의 북쪽문으로 사실상의 정문이다. 장안(長安)이란, 수도임을 뜻함과 동시에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였으며,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는 뜻이 담겨있다.

장안문은 기초다지기에 있어 주목할만점이 있는데, 남모래와 진흙에 물을 섞어 다지면서, 시루떡을 앉히듯이 켜켜히 쌓아올렸다. 그 튼튼함은 화강석의 기단과 문루의 무게를 든든히 버티고 있음은 물론이고, 지나는 수많은 자동차의 통행에 의한 충격에도 건재하다.

한국전쟁 당시 문루가 불탄것을 1975년 복원하였다.

 

 

 

 

홍이포(紅夷砲, 길이 215m, 구경 10Cm, 중량 1800kg)

이름 그대로 오랑캐를 겨냥하고 있는 포다.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청나라때가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로,

사정거리가 700m에 이른다. 성곽, 포루등에 방어용으로 설치되거나 성과 공격용으로 사용한다.

 

북동포루(北東砲樓)

화성내의 5개 푸루중 북동쪽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자리하며, 정조18년(1794년) 9월 23일에 완공 되었다.

적군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안을 비워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했다.

 

 

화홍문 가는길

수원천변을 따라 자전거통행로와 산책로가 내어져 있다.

 

 

 

북수문(北水門)

다른 이름으로 현판에 화홍문(華虹門)이라 써져 있어 그리 부르기도 한다.

광교산에서 흐르는 수원천이 화성을 관통하면서 지나는 데, 이를 지나게 하는 수문으로 남과 북으로 두개의 수문을 두고 있었으나,

벽돌로 조성한 남수문은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고,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만이 남았다.

중아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7개의 홍예문을 내어 홍수기에도 물살의 흐름을 유도하였으며, 수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했다.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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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길손의 旅行自由
글쓴이 : 길손旅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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